국사 의천이, 의종 19년 및 명종 22년에는 지칭(智偁)이, 명종 10년에는 정각승통(正覺僧統)이 고시관을 했다는 기록을 통해 고시관은 각 종파의 고승이 겸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으나 무신집권 이후에는 간혹 유학을 닦은 과거급제자도 고시관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무신정변 이후 큰 화
1. 서언
2001년 11월 고려말 공민왕이 태고 보우스님을 국사로 추대하면서 교지를 내리는 의식을 재현한 태고 보우국사국사 추대 재현식이 6일 사나사에서 열렸다. 고려말이라는 정치적 혼란기에 단순히 불교계의 큰스님이 아니라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로 시대를 온몸으로 훑어갔던 태고 보우스님의
고구려
1. 성립과 발전
BC 37년에 주몽(朱蒙)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佳江:渾江) 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通溝]로 옮긴 뒤 낙랑군과 임둔군(臨屯郡)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1.불교의 분파
불교는 청정무위(淸淨無爲)를 주장하고 자비를 근본으로 하나, 불경에 대한 이해를 달리함으로써 여러 종파로 나뉘어졌다. 인도에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있고, 중국에서는 천태종, 현수종, 선종, 밀종 등이 있다. 종파간의 차이, 모순과 대립, 투쟁은 매우 격했고, 같은 종파 안에서도
원융국사비 등등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어렸을 때는 수학여행으로 답사를 가더라도 유적들을 그다지 관심 있게 보지 않았는데 이제는 달랐다. `부석사가 어떤 곳이다`라는 것을 사전에 알고, 직접 답사를 해보니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과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우
국사 의천, 보조국사 지눌
고려불교의 큰 특징은 교종과 더불어 선종의 사상이 상호균형을 이루며 불교계를 이끌어 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종과 선종사이의 갈등과 화해는 중요한 철학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교종과 선종사이의 갈등과 화해는 중요한 철학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또
국사 의천
1. 대각국사 의천의 사상
의천이 활동하던 당시의 고려 불교계는 선(禪)과 교(敎)의 대립이 컸다. 그의 사상은 화엄(華嚴)으로 다듬어졌으나 혜능(慧能, 638~713)을 중심으로 한 남종선 계통의 선법(禪法)이 지방 호족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기존의 교학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새로운 불교를 널리
국사 지눌
변란과 민란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정변으로 인하여 종교적인 기강이 무너지고 선종과 교종간에는 극심한 반목과 대립이 일어나던 시기에 살았던 지눌은 한평생 불교계가 해결해야할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였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실천적 노력을 기울였다. 김군수찬 「불일보
지눌의 사상
Ⅰ.서론
고려 보조국사 지눌은 원효와 함께 한국불교 사상사에서 손에 꼽힐 만한 스승이다. 그는 몸소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을 걸었으며 또 그 길을 모든 삶들을 위하여 드러내 보였다.
그의 사상은 12,3세기 고려불교가 당면했던 그의 통찰과 고뇌, 체험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
자신의 마음을 찾아 길들이고자 하셨던 스님의 뜻을 담고 있다. 법명은 지눌, 추증된 시호는 불일보조국사인데 이 시호는 희종임금(1204~1211)이 추증하였다 희종임금은 당대에 지눌을 가장 크게 지원한 임금이다. 지눌 스님은 1210년 열반에 들었다.
---> ‘목우도’
* 지눌은 어떻게 승려가 되었는가?